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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24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오랫동안 민사실무를 지배해왔던 중요한 법리를 변경하는 판결을 선고했다. 채무자가 소멸시효 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종래의 법리를 폐기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해당 판결의 구체적 내용과 그 의미, 그리고 앞으로의 실무 변화에 대해 상세히 분석해보고자 한다.
1. 사안의 개요
원고는 피고로부터 4차례에 걸쳐 총 2억 4,000만 원을 차용하였다. 그 중 제1, 2차 차용금 이자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에서 원고는 피고에게 1,800만 원을 일부 변제하였다. 이후 원고 소유 부동산에 대한 경매에서 근저당권자인 피고가 461,436,162원을 배당받는 내용으로 배당표가 작성되었고, 원고는 피고에 대한 배당액이 실제 대여원리금 채권액을 초과한다며 배당이의의 소를 제기하였다.
2. 소송의 경과와 쟁점
제1심에서는 원고가 일부 승소하였으나 당시 소멸시효는 쟁점이 되지 않았다. 원심에서는 원고가 제1, 2차 차용금 이자채권의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였으나, 법원은 원고가 소멸시효 완성 상태에서 차용금을 일부 변제함으로써 시효이익을 포기하였다고 판단하였다. 다만 변제충당 법리에 따라 배당액 중 일부 감액이 필요하다고 보아 원고의 배당이의 청구를 일부 인용하였다.
상고심의 핵심 쟁점은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에는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본 종래 대법원 66다2173 판결 등의 추정 법리 변경 여부였다.
3.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단
가. 다수의견(8인)의 핵심 논리
대법원 다수의견은 종전 판례의 추정 법리가 타당하지 않으므로 변경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대법원(재판장 대법원장 조희대, 주심 대법관 권영준)은, 소멸시효 완성 후 채무 일부를 변제한 것이 시효이익 포기인지 문제된 사건에서, 아래 전원합의체 판결을 선고하여 이와 달리 종래 법리에 따라 판단한 원심판결을 파기환송 하였음(대법원 2025. 7. 24. 선고 2023다240299 전원합의체 판결)
○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하였더라도 이로써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그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하였다’고 추정할 수 없음. 이러한 추정은 경험칙으로 뒷받침되지 않거나 오히려 경험칙에 어긋나고,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의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이며, 권리나 이익의 포기를 엄격히 해석하는 일반적 원칙과 부합하지 않고, 채무자에게 추정을 번복할 부담을 부과함으로써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함.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시효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하였는지는 개별 사안의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함
○ 이와 달리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판단한 종전 대법원 판례를 변경함
첫째, 추정 법리는 경험칙으로 뒷받침되지 않거나 오히려 경험칙에 어긋난다.
추정 법리는 시효완성 후 채무자의 채무승인 사실로부터 ① 시효완성에 관한 채무자의 인식과 ② 시효이익 포기에 관한 채무자의 의사표시를 사실상 추정하는 법리이다. 그러나 단지 소멸시효 기간이 지났다는 사정만으로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았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채무자가 시효완성으로 채무에서 해방되는 이익을 알면서도 그 이익을 포기하고 채무를 부담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오히려 경험칙에 비추어 보면,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은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하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둘째,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시효이익 포기는 단순히 채무에 관한 인식을 표시하는 것을 넘어, 소멸시효의 완성으로 인한 법적 이익을 받지 않겠다는 효과의사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채무승인과 구별된다. 추정 법리는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의 근본적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채무승인행위가 있으면 곧바로 시효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추정하는 구조를 취하므로 타당하지 않다.
셋째, 권리 또는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는 신중하게 해석해야 한다.
추정 법리는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이라는 행위만을 근거로 채무자에게 중대한 불이익을 가져오는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손쉽게 추정한다. 이는 권리 또는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에 대해 엄격하고 신중한 해석을 요구하는 대법원 판례의 일반적인 원칙과 부합하지 않는다.
넷째, 추정 법리는 채무자를 부당하게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한다.
소멸시효는 권리자가 일정 기간 권리를 행사하지 않은 경우 일정한 요건 아래 권리를 소멸시킴으로써 법적 안정성을 도모하는 제도이다. 그런데 추정 법리는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이라는 사정만 있으면 이로써 시효완성 사실에 대한 인식과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추정하고, 채무자로 하여금 추정을 번복하게 할 부담을 부과한다. 이는 채무자를 본래 법이 예정하지 않았던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하는 것이다.
나. 이 사건의 결론
대법원은 원고가 제1, 2차 차용금 이자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에서 피고에게 1,800만 원을 일부 변제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그것만으로 당시 원고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그로 인한 법적인 이익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하였다고 추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원심이 일부 변제 당시 원고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시효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하였는지 여부를 구체적으로 심리하지 않은 채, 일부 변제 사실로부터 곧바로 시효이익 포기를 추정하여 원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을 배척한 것은 잘못이라고 보았다.
다. 별개의견(5인)의 입장
별개의견은 원심판결에 잘못이 있다는 다수의견의 결론에는 동의하면서도, 추정 법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원심이 법리를 잘못 해석·적용한 것이므로 추정 법리에 관한 판례 변경은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별개의견에 따르면, 추정 법리의 근거인 경험칙이 처음부터 명백히 잘못되었다거나 사회일반의 상식에 반하는 것이 되었다고 볼 만한 자료는 없으며, 추정 법리는 대법원이 오랜 시간에 걸쳐 타당성을 인정하고 적용해온 것으로서 여전히 법리적으로나 실무적으로 타당하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판결의 의의와 실무 변화
가. 획일적 추정에서 구체적 판단으로
이번 판결의 가장 큰 의의는 일반인의 상식과 경험칙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려웠던 획일적인 추정 법리를 폐기하고, 원칙으로 돌아가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도 그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하였는지 여부를 구체적으로 판단하도록 한 점이다.
앞으로 법원은 시효이익 포기 여부를 판단할 때 개별 사안에 존재하는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특히 일부 변제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 일부 변제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동기와 경위 및 자발성
- 일부 변제액과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무액 사이의 차이
- 일부 변제 당시 시효기간을 도과한 정도
- 일부 변제 당시와 전후 언동
- 당사자들의 관계와 거래지식 및 경험 등
나. 채무자 보호 강화
종전에는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조금이라도 변제하면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되어 채무자에게 추정을 번복할 부담이 가해졌다. 이번 판결로 인해 채무자에게 불리하게 치우쳤던 심리 구조가 공평하게 바로잡히게 되었다.
특히 시효완성 사실을 모르고 선의로 일부 변제한 채무자들이 불측의 피해를 당하는 일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채권자 입장에서는 시효이익 포기를 주장하려면 더욱 구체적이고 명확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다. 법적 안정성과 예측가능성 제고
이번 판결은 소멸시효 제도의 본래 취지인 법적 안정성 도모에도 부합한다. 채무자가 시효완성으로 인한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경우를 보다 명확히 하여 법적 예측가능성을 높였다.
5. 실무상 유의사항
가. 채권자 측면
채권자는 앞으로 채무자의 시효이익 포기를 주장하려면 단순한 채무승인이나 일부 변제 사실만으로는 부족하고,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효이익을 포기하겠다는 명시적 또는 묵시적 의사표시를 하였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나. 채무자 측면
채무자는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하거나 일부 변제하더라도 더 이상 자동으로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되지 않는다. 다만 구체적인 사정에 따라 시효이익 포기로 인정될 수 있으므로, 시효완성 후에는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특히 시효완성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변제하거나 채무를 승인하는 경우에는 여전히 시효이익 포기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6. 결론
가. 법리적 측면의 문제점
1) 경험칙에 대한 성급한 부정
다수의견은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은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하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실증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다.
첫째, 일반인의 시효 인식 수준에 대한 과소평가: 현대 사회에서 금융거래 경험이 있는 일반인들은 대부분 채무의 시효 개념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다. 특히 개인 간 차용거래에서 수년이 경과한 후 변제하는 경우, 채무자가 시효완성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현실과 괴리가 있다.
둘째, 변제 행위의 성격에 대한 고려 부족: 채무자가 자발적으로 변제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채무의 존재를 인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효완성을 모르는 상태에서의 변제와 시효완성을 알면서도 하는 변제를 동일선상에서 평가하는 것은 변제 행위의 법적 의미를 축소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2)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의 구분론의 한계
다수의견은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를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구체적인 구분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실제 거래에서의 모호성: 일반인들이 시효완성 후 변제할 때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를 명확히 구분하여 의사표시한다고 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 채무자는 단순히 "빚을 갚겠다"는 의사로 변제하는 것이며, 이를 법적으로 세분화하여 해석하는 것은 일반인의 법감정과 맞지 않을 수 있다.
법적 안정성 저해 우려
판단 기준의 추상성: 새로운 판단 기준으로 제시된 "구체적인 동기와 경위", "당사자들의 관계와 거래지식" 등은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예측가능성을 오히려 떨어뜨릴 수 있다. 이는 법적 안정성을 도모한다는 소멸시효 제도의 취지와 모순된다.
나. 실무적 측면의 문제점
1) 입증책임의 과도한 가중
채권자의 입증 부담 가중: 종전에는 채무자의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 또는 변제 사실만 입증하면 시효이익 포기가 추정되어 채무자가 반박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이제 채권자는 채무자의 시효완성 인식과 포기 의사를 구체적으로 입증해야 하는데, 이는 내심의 의사에 해당하는 사항으로 입증이 매우 곤란하다.
증거 수집의 현실적 어려움: 시효완성 후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후 소송이 제기되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채무자의 인식 상태나 의사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하기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2) 소액 채권 회수의 어려움
소액 채권자의 권리 구제 곤란 개인 간 소액 차용에서는 정식 계약서 작성이나 변제 시 확인서 작성 등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일부라도 변제했다면 채무 존재에 대한 인정으로 볼 수 있음에도, 새로운 기준으로는 채권 회수가 사실상 불가능해질 수 있다.
다. 향후 우려되는 부작용
1) 악의적 채무자의 시효 남용
고의적 시효 원용 증가: 시효이익 포기 인정이 어려워지면, 악의적 채무자들이 고의로 시효 완성을 기다린 후 소액 변제를 통해 채권자를 기만하는 사례가 증가할 우려가 있다.
2) 금융거래 질서의 혼란
대출 관행의 변화 강요: 금융기관들이 기존의 대출 관리 방식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하는 부담이 발생하며, 이는 금융비용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3) 분쟁 증가 우려
소송 증가 가능성: 명확했던 추정 법리가 사라지면서 시효이익 포기 여부를 둘러싼 분쟁이 오히려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사법부의 업무 부담 증가와 사회적 비용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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